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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4 | 1 | [[분류:랜드해협]][[분류:루이나]][[분류:루이나의 논란]][[분류:고랜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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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4 | 3 | ||<-2><tablealign=right><tablewidth=440><tablebordercolor=#536349><tablebgcolor=#fff,#1c1d1f><bgcolor=#536349><color=#fff> {{{+1 '''카우스만 침공'''}}}[br]{{{-2 Bay of Cows Invasion}}} || |
| r1 (새 문서) | 4 | ||<-2> [[파일:attachment/Cay_of_Pows.jpg|width=100%]] || |
| r4 | 5 | ||<width=28%><bgcolor=#536349><color=#fff> '''일시''' || 1979년 7월 21일 ~ 7월 24일 || |
| 6 | ||<bgcolor=#536349><color=#fff> '''장소''' || [[고랜드]] 북부 연안 카우스만 || | |
| 7 | ||<bgcolor=#536349><color=#fff> '''작전명''' || HARROW || | |
| 8 | ||<bgcolor=#536349><color=#fff> '''교전 세력''' || 자히르 여단 (루이나 지원)[br]고랜드 민주공화국 (사비에트 고문단 지원) || | |
| 9 | ||<bgcolor=#536349><color=#fff> '''지휘관''' || 모하마드 S. 바르자이 대령[br]피델 성베르트 부총리 || | |
| 10 | ||<bgcolor=#536349><color=#fff> '''병력''' || 1,420명[br]약 2만 명 || | |
| 11 | ||<bgcolor=#536349><color=#fff> '''피해''' || 전사 118명, 포로 1,187명[br]전사 약 310명 (사비에트 고문 3명 포함) || | |
| 12 | ||<bgcolor=#536349><color=#fff> '''결과''' || 침공군 전멸, 성베르트의 부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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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목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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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1 (새 문서) | 17 | == 개요 == |
| r4 | 18 | > 우리는 왕을 위해 상륙했다. 그런데 그 해안에는 왕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
| r1 (새 문서) | 19 | >---- |
| r4 | 20 | > 자히르 여단 생존자 굴람 R. 나지미, 1994년 회고 |
| r1 (새 문서) | 21 | |
| r4 | 22 | 1979년 7월 [[루이나]] 군정의 지원을 받은 [[고랜드]] 왕당파 망명자 부대가 고랜드 북부 연안의 카우스만에 상륙해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의 전복을 시도했다가 나흘 만에 전멸한 사건. 루이나 측 작전명은 HARROW였다. |
| 23 | ||
| 24 | 작전은 1978년 루이나 군정을 세운 국가비상위원회와 [[NIA]]가 1979년 3월의 헤라트 반란을 공산 정권 붕괴의 신호로 읽으면서 시작되었다. 폐위된 바티스타 왕가의 지지자 1,400여 명이 당시 웨스타시아의 괴뢰국이던 [[유고랜드]]의 남부 사막에서 훈련을 받았고, 상륙과 동시에 해안에 왕국 임시정부를 세워 북부의 봉기를 이끌어 낸다는 것이 계획의 골자였다. | |
| 25 | ||
| 26 | 그러나 왕당파의 지지 기반은 바다가 없는 남부의 부족 지대였고, 상륙할 수 있는 해안은 왕가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북부에만 있었다. 계획은 웨스타시아를 통해 사비에트로 새어 나갔고, 방어를 지휘한 부총리 피델 성베르트는 상륙군을 해안의 습지에 가둔 채 나흘 만에 섬멸했다. | |
| 27 | ||
| 28 | 작전의 실패는 고랜드 현대사의 방향을 바꾸었다. 승리로 명성을 얻은 성베르트는 두 달 뒤 타라키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고, 루이나가 다시 고랜드에 손을 뻗으리라고 확신한 사비에트는 그해 12월 [[사비에트-고랜드 전쟁|고랜드 침공]]을 결정했다. 1980년 헌정을 회복한 루이나는 이 실패를 교훈 삼아 직접 작전 대신 유고랜드를 거쳐 무자헤딘을 무장시키는 방식을 택했다. 카우스만 침공은 루이나 정보 공작 사상 가장 참혹한 실패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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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 배경 == | |
| r4 | 31 | === 4월 쿠데타와 헤라트 반란 === |
| 32 | 1978년 4월 좌익 장교들의 쿠데타로 다우드 칸 정권이 무너지고 고랜드 인민민주당의 공산 정권이 들어섰다. 혁명평의회 의장 겸 총리에는 누르 모하마드 타라키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에는 피델 성베르트가 올랐다. 새 정권의 급진적인 토지 개혁과 종교 탄압은 곧 전국적인 반발을 불렀고, 1979년 3월 15일 서부 도시 헤라트에서 일어난 반란은 사비에트인 고문들이 살해될 만큼 격렬했다. 정부군 일부가 반란군에 가담하면서 헤라트는 일주일 가까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났다. | |
| r1 (새 문서) | 33 | |
| r4 | 34 | 헤라트 반란은 해협 건너에서 전혀 다르게 읽혔다. 루이나 NIA는 4월 보고서에서 "인민민주당 정권은 군의 충성을 잃었으며, 외부의 결정적 충격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보고서는 반란의 주력이 왕정 복고가 아니라 이슬람의 이름으로 싸우는 부족과 성직자들이었다는 점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 |
| r1 (새 문서) | 35 | |
| r4 | 36 | === 루이나 군정과 고랜드 === |
| 37 | 당시 루이나는 1978년 성립한 국가비상위원회의 군정 아래 있었다. 군정은 [[검은 10년]]의 혼란을 끝내겠다며 권력을 잡았지만, 국내의 폭력은 멈추지 않았고 정당성은 흔들리고 있었다. 대외적인 성과가 필요했던 군정에게 고랜드는 매력적인 표적이었다. 고랜드는 '랜드해협의 밀창고'라 불리는 곡창지대였고, 루이나는 1950~60년대 농업 협력을 명분으로 고랜드에 곡물 저장시설과 기술 인력을 투자해 온 나라였다. 공산 정권의 토지 국유화로 그 이권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 |
| r1 (새 문서) | 38 | |
| r4 | 39 | 문제는 수단이었다. 군정 아래에서 NIA는 국내 사찰에 인력을 빼앗겨 해외 공작 역량이 크게 줄어 있었다. 루이나군을 직접 보내는 것은 사비에트와의 전쟁을 뜻했으므로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남은 선택지는 망명자를 무장시켜 '고랜드인의 손으로'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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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4 | 41 | === 망명자들 === |
| 42 | 1973년 다우드 칸의 쿠데타로 폐위된 바티스타 자히르 샤 국왕은 옛 식민 본국인 마베라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왕정의 장교와 관료, 지주 가운데 상당수도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의 정변을 거치며 해외로 흩어졌다. NIA는 1978년 가을부터 이들을 모아 부대를 꾸렸고, 부대는 국왕의 이름을 따 「자히르 여단」이라 불렸다. 여단장은 왕립군 출신의 모하마드 S. 바르자이 대령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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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4 | 44 | 훈련지는 유고랜드 남부의 사우스센트럴 사막이었다. 당시 유고랜드는 웨스타시아의 괴뢰국이었고, 훈련장의 경비와 보급은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이 맡았다. 루이나는 교관과 무기, 자금을 대고, 웨스타시아는 땅과 눈가림을 대는 분업이었다. 국왕 자히르 샤는 여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끝까지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그는 "외국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는 왕은 두 번 쫓겨난다"며 거리를 두었고, 이 침묵은 훗날 작전의 정당성을 크게 약하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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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4 | 46 | == 계획 == |
| 47 | === HARROW 작전 === | |
| 48 | 작전은 1979년 5월 국가비상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계획은 세 단계였다. 먼저 국적 표지를 지운 구형 공격기로 북부의 공군기지를 폭격해 제공권을 확보한다. 이어 자히르 여단이 북부 연안의 카우스만에 상륙해 해안 교두보를 만든다. 교두보가 72시간을 버티면 바티스타 왕가의 라힘 샤 왕자가 들어와 「고랜드 왕국 임시정부」를 선포하고, 북부의 도시와 부족이 호응해 봉기하면 루이나와 우방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구상이었다. | |
| r1 (새 문서) | 49 | |
| r4 | 50 | 공격기는 1973년 이전 왕립 공군이 쓰던 기종이었고, 조종사도 왕립 공군 출신 망명자였다. NIA는 공습을 '왕립 공군 잔존 세력의 귀환'으로 연출할 생각이었다. 루이나 해군은 공해에서 수송선을 호위하되, 고랜드 영해에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제약을 받았다. |
| 51 | ||
| 52 | === 계획의 결함 === | |
| 53 | 계획에는 처음부터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 |
| 54 | ||
| 55 | 첫째는 지리였다. 바티스타 왕가의 지지 기반은 남부 산악의 파슈툰계 부족 지대였지만, 고랜드의 해안은 북부에만 있었다. 북부 연안 도시들은 마베라 식민 시대부터 이주민과 상인이 모여 산 곳으로, 왕가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약한 지역이었다. 카우스만이 선택된 것은 지지 기반이 있어서가 아니라 배를 댈 수 있어서였다. | |
| 56 | ||
| 57 | 둘째는 반란군과의 관계였다. NIA는 상륙이 성공하면 헤라트 이후 곳곳에서 일어난 반정부 무장세력이 합류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슬람 부족 지도자와 성직자들에게 바티스타 왕가는 서구화와 세속 개혁으로 전통 공동체를 무너뜨린 장본인이었다. 이들은 공산 정권만큼이나 왕정 복고를 반대했고, 루이나가 사전에 접촉한 부족 지도자 가운데 합류를 약속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
| 58 | ||
| 59 | 셋째는 보안이었다. 웨스타시아는 자유 진영에 가까웠지만 사비에트와의 교역을 끊지 않는 나라였고, 정보당국 안에는 양쪽에 줄을 대는 인물이 적지 않았다. 훈련장의 규모와 상륙 예정 시기는 6월 초에 이미 사비에트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전달되어 있었다. 이 사실은 1990년 사비에트의 정보 공개로 처음 확인되었다. | |
| 60 | ||
| 61 | == 전개 == | |
| 62 | === 사전 공작 === | |
| 63 | 6월부터 NIA는 소규모 공작조를 북부에 침투시켜 교량과 전신선을 끊는 사보타주를 벌였다. 공작은 봉기의 불씨가 되기는커녕 정부의 경계만 높였다. KGB의 통보를 받은 성베르트는 북부 방위를 직접 맡아 연안 도시에 계엄을 선포하고, 반정부 혐의자 수천 명을 예방 구금했다. 사비에트 군사고문단은 북부 해안의 레이더와 대공포 배치를 다시 짰다. | |
| 64 | ||
| 65 | === 7월 21일 === | |
| 66 | 7월 21일 새벽 국적 표지를 지운 공격기 8대가 유고랜드의 비행장을 떠나 북부의 공군기지 세 곳을 폭격했다. 활주로에 있던 고랜드 공군기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사전 경보를 받은 정부군은 주력기를 이미 분산시켜 둔 상태였다. 이 공습으로 기지에 있던 사비에트 고문 3명이 숨졌다. 루이나가 키운 부대가 사비에트인을 죽였다는 사실은 크라슬리스크에서 이 작전을 단순한 망명자 소동이 아닌 루이나의 공격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 |
| 67 | ||
| 68 | 2차 공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습기 가운데 1대가 격추되어 조종사가 붙잡히자 국가비상위원회는 루이나의 개입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추가 출격을 취소했다. 상륙군은 제공권 없이 바다를 건너야 했다. | |
| 69 | ||
| 70 | === 상륙 === | |
| 71 | 7월 22일 새벽 자히르 여단 1,420명이 카우스만에 상륙했다. 만의 안쪽은 카우스 강 하구의 넓은 염습지였고, 해변에서 내륙 도로까지는 습지 사이로 난 둑길 두 개뿐이었다. 성베르트는 둑길의 출구를 막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정부군 약 2만 명과 전차 대대가 둑길 끝을 봉쇄했고, 여단은 해변과 습지 사이의 좁은 띠에 갇혔다. | |
| 72 | ||
| 73 | 오후에는 살아남은 고랜드 공군기가 연안의 수송선을 공격해 탄약과 통신 장비를 실은 화물선 1척을 격침시켰다. 루이나 해군은 영해 밖에서 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여단의 무전은 끊겼고, 봉기를 알리는 신호를 기다리던 라힘 샤 왕자는 수송선에서 끝내 내리지 못했다. | |
| 74 | ||
| 75 | === 붕괴 === | |
| 76 | 7월 23일 여단은 둑길 돌파를 두 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북부의 어느 도시에서도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연안 마을의 주민들은 습지로 흩어진 여단 병사들을 정부군에 신고했다. 7월 24일 오후 바르자이 대령은 남은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 상륙군 가운데 118명이 전사했고 1,187명이 포로가 되었다. 100여 명은 습지를 건너 산악으로 흩어졌으나 대부분 뒤에 붙잡혔다. 정부군은 약 310명이 전사했다. | |
| 77 | ||
| 78 | > 제국주의자들은 고랜드 인민이 왕을 그리워한다고 믿었다. 카우스의 습지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인민은 왕도, 그 왕을 실어 온 배도 원하지 않는다. | |
| 79 | >---- | |
| 80 | > 피델 성베르트, 1979년 7월 25일 라디오 연설 | |
| r1 (새 문서) | 81 | |
| 82 | == 결과 == | |
| r4 | 83 | === 포로와 재판 === |
| 84 | 8월 성베르트는 수도 아바나에서 포로들에 대한 공개 재판을 열었다. 재판은 라디오로 전국에 중계되었고, 루이나인 교관의 존재와 유고랜드 훈련장의 위치가 포로들의 진술로 드러났다. 루이나 군정은 개입을 끝까지 부인했다. 8월 19일 바르자이 대령을 비롯한 여단 지휘부 14명이 처형되었다. | |
| r1 (새 문서) | 85 | |
| r4 | 86 | 나머지 포로는 성베르트 정권과 뒤이은 카르말 정권 아래에서 2년 가까이 수감되었다. 사비에트의 침공 이후 카르말 정권은 이들을 루이나를 상대로 한 협상 카드로 썼다. 1981년 5월 새로 출범한 [[리처드 앨런 베인브리지|베인브리지]] 정부는 [[플로렌시아]]의 중재로 의약품과 비료 4,800만 달러어치를 제공하는 대가로 생존 포로 1,026명을 돌려받았다. 수감 중 숨진 포로는 140여 명에 이르렀다. 루이나 정부가 작전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이 교환 직후였다. |
| r1 (새 문서) | 87 | |
| r4 | 88 | === 고랜드 === |
| 89 | 카우스만의 승리는 성베르트를 혁명의 수호자로 만들었다. 그는 승리를 발판으로 군과 보안기관을 장악했고, 북부 방위 과정에서 구금한 반정부 인사들을 '침략의 앞잡이'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두 달 뒤인 1979년 9월 성베르트는 타라키를 죽이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급진 정책과 숙청은 반란을 더욱 키웠고, 이는 곧 사비에트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 |
| r1 (새 문서) | 90 | |
| r4 | 91 | === 사비에트 === |
| 92 | 사비에트 지도부는 카우스만 침공을 루이나가 고랜드에 직접 손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1979년 3월 파병을 거절했던 사비에트가 12월 침공을 결정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지만, 12월 12일 밀실 합의의 참석자들이 "루이나는 이미 한 번 상륙했다"는 논리를 되풀이했다는 것은 여러 회고로 확인된다. 역설적이게도 사비에트가 제거한 성베르트는 카우스만에서 루이나를 물리친 바로 그 사람이었다. | |
| r1 (새 문서) | 93 | |
| r4 | 94 | === 루이나 === |
| 95 | 군정은 작전을 철저히 은폐했지만, 1980년 [[10.24 시민혁명]]으로 헌정이 회복된 뒤 1981년 정보기관 조사위원회가 HARROW 작전의 전모를 밝혔다. 조사위원회는 작전이 군정의 정치적 필요에서 출발했고, NIA가 헤라트 반란의 성격을 잘못 읽었으며, 국가비상위원회가 작전 도중 지원을 끊어 망명자들을 사지에 버렸다고 결론 내렸다. | |
| r1 (새 문서) | 96 | |
| r4 | 97 | 교훈은 뚜렷했다. 루이나는 이후 고랜드에 자국이 키운 부대를 직접 보내지 않았다. 1983년 본격화된 사이클론 작전은 루이나가 무기와 자금을 대고, 싸움은 현지의 무자헤딘이 맡는 방식으로 설계되었다. 왕당파가 아니라 왕정 복고를 거부했던 바로 그 이슬람 부족들이 루이나의 새 동맹이 된 것이다. |
| r1 (새 문서) | 98 | |
| r4 | 99 | === 유고랜드와 웨스타시아 === |
| 100 | 자히르 여단이 훈련받던 사우스센트럴 사막의 시설은 작전이 끝난 뒤 폐쇄되지 않았다.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은 이 시설과 보급로를 그대로 활용해 1980년대 초 무자헤딘 지원 경로를 운영했고, 1984년 유고랜드가 독립한 뒤에는 유고랜드 군정보국이 이를 넘겨받았다. 카우스만의 실패가 남긴 기반 시설이 사이클론 작전의 뼈대가 된 셈이다. 웨스타시아 정보당국을 통한 정보 유출은 1990년 사비에트의 정보 공개로 드러났지만, 웨스타시아는 이미 1984년 [[마테르 전쟁]]으로 사라진 뒤였다. | |
| r1 (새 문서) | 101 | |
| r4 | 102 | == 평가 == |
| 103 | 카우스만 침공은 흔히 정보 실패의 교과서로 불린다. NIA는 헤라트 반란을 정권의 약점으로만 읽고 그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으며, 왕당파의 기반과 상륙 지점이 서로 다른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계획 단계에서 걸러 내지 못했다. 동맹국을 통한 보안 유출, 개입을 숨기려는 정치적 제약 때문에 중단된 항공 지원도 실패를 키웠다. | |
| r1 (새 문서) | 104 | |
| r4 | 105 | 그러나 더 큰 논점은 작전의 결과다. 루이나가 무너뜨리려던 정권은 이 작전으로 가장 강경한 지도자를 얻었고, 사비에트는 이 작전을 보고 직접 개입을 결심했다. 이 때문에 연구자들은 카우스만 침공을 실패한 작전이 아니라 10년 전쟁의 도화선 가운데 하나로 평가한다. |